P001 → BURNING GROUND
버닝 그라운드: 겁쟁이의 전장에서 타오르다.
류희연 (독립 큐레이터)
최민영이 그려낸 이미지들은 마치 한 폭의 불확실성 게임과 같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정해진 규칙이나 결과 대신, 변화무쌍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도록
유도한다. 고정된 결과나 승패보다는 과정 그 자체를 통해 불확실성을 경험하고, 그것이 주는 긴장감과 가능성을 탐구하는 스테이지로 볼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은 끝없는 퀘스트의 연속이다. 특정 목표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여정인 퀘스트에서 마주하게 되는
선택들은 단순한 판단이 아니라 생존 본능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다. 작가는 그 과정에서 인간의 내면을
지배하는 본능의 영역을 드러내기 위해 퀘스트로서의 일상을 구현한다. 삶을 거대한 시뮬레이션으로 상정하고, 그 안에서의 생존 본능과 투쟁의 흔적을 작업에 투영한다. 이때 에어
브러쉬로 출력되는 이미지는 현실과 초현실에 균열을 내며, 일상과 비일상 사이의 간극을 자유로이 넘나든다. 때로는 날카롭고 선명하게, 때로는 모호하고 흐릿한 분사의 흔적들은
긴장감 넘치는 삶의 장면을 구축해 나간다.
최민영의 작업은 이처럼 불확실성과 가능성의 경계에서 인간 경험의 다층적 구조를 탐구한다. 삶이라는 가능성의 영토는 끊임없이 우리를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하고,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은 본능적 감정과 신체적 반응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낯섦과 두려움, 설렘과 같은 감정의 스펙트럼을 경험하며 본능과 이성이 교차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이러한 감정과 반응은 생존의 도구로 기능할 수도, 혹은 변수가 되어
훼방을 놓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복잡한 내면을 화면 위에 응축된 순간으로 제시하며 관람자가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게 한다. 이 화면은 단순히 본능적 반응에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불확실성 속에서 새롭게 열리는 가능성의 풍경을 보여주며 인간 본능과 감정의 근원을 탐색하게 한다.
작가가 즐겨
하는 복싱은 이 같은 작업의 주제와 깊이 맞닿아 있다. 링 위에서 상대와 마주하며 그는 본능과 의식
사이에서 발생하는 복합적인 긴장 상태를 경험한다. 맞기 싫어 도망치고 싶은 본능(도피)과 상대를 제압하려는 의지(투쟁)가 충돌하는 그 순간, 그는 원초적 생존 본능과 직면한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작업 속에서 드러나, 도피-투쟁 반응을 현대적 맥락으로 재해석하게 한다. 도피와 투쟁의 역사는
인류의 오랜 역사와 함께 해왔다. 우리의 조상들은 수풀 너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맹수일 가능성에 대비해
도망쳤고, 그 겁쟁이의 유전자가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현대인은 더 이상 맹수에게 쫓기지 않는다. 대신, 끝없이
반복되는 삶의 굴레 속에서 다른 형태의 위협과 마주한다. 원시 본능 생존 시나리오는 현대적으로 변모하였다. 자기 능력만으로 무언가를 쟁취해야 하는 순간, 막중한 책임감이 무섭게
다가오는 중요한 결정을 앞둔 상황, 마음에 둔 이성 앞에서의 떨림 등의 불확실성은 우리를 끝없는 긴장
상태로 몰아넣는다.
작가는 이러한
급박한 생존의 순간들을 작업으로 끌어와, 현대인의 삶 속에 여전히 작동하는 원시 본능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순간들이 개인의 감정과 경험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며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는지를 시각화한다. 특히, 생존 본능의 극적인 긴장감은 그의 작업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며, 관람자가 불확실성과 마주하는 자기 내면을 돌아보도록 유도한다.
삶의 작은 선택들은
모두 생존의 시뮬레이션임을 암시한다. 플레이어가 고정된 규칙이나 목표를 넘어, 매 순간 선택과 대응을 통해 자신의 서사를 만들어가듯, 최민영의
작업은 관람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부여한다. 작가는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지배하는 원초적 본능과
그 너머를 향한 의지를 탐구한다. 마치 미지의 설계자가 의도적으로 플레이어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처럼, 최민영의 작업은 관람자를 불확실성 속에서 헤매게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불확실성이야말로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점이다. ‘버닝 그라운드’, 이곳은 도피와 투쟁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이 이루어지는 장소이자, 두려움이
생존 본능으로 점화되는 순간이다. 그것은 자신 안의 빌런과 맞서 싸우며, 내적 한계를 돌파하려는 과정에서 인간이 진정으로 타오를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낸다.